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사당동/신길동 박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는 시 구절을 떠올리며 이제 난 나의 어줍잖은 참회록을 쓴다. 아니 이건 참회록이라기 보다는 나의 투병기라 해야 함이 옳을 듯하다. 이 자리마저 교활한 자기 합리화와 형이상학적인 미화로 흐를 수 있음을 경계하며 완전한 자기 부정 뒤의 진정한 새 삶의 창조를 꾀하는 장으로 살아보려 한다.

결코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내 파멸의 흔적들은 아직도 사회 속의 나를 질곡하고 내 아내와 부모님, 그리고 이제 막 말을 쏟아 내기 시작하는 나의 아들에게 흉칙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젊은 날의 방황, 사회생활의 적응기 쯤으로 치부했던 내 타락의 과정은 이제 내 생의 많은 부분을 회한으로 물들이고 있다.

조직 속의 중간 관리자로 건강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리잡고 있어야 할 지금 난 내가 향유할 수 있었던 기득권들을 박탈당한 채 가장 밑바닥에 박혀 있는 심정이다. 처참하게 겪었던 절망의 경험들이 단도박을 기반으로 새로운 삶의 창조로 이어진다면 가치있는 생의 자양분이 되겠지만, 다시 무너진다면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괴롭히던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미한 자신감에 나의 허망했던 삶을 반추해 보고 운명의 수동적 방관자가 아닌 능동적인 창조자로서 다시 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내게 도박이 운명적인 아픔으로 다가 온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2년여쯤 지나고 였다. 물론 학창시절부터 도박은 내게 매력적인 놀음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난 써클에서의 MT 등에선 예외없이 화투와 포카가 함께 했지만 당시는 여흥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2년여, ‘신화’라고 까지 불리며 초고속 성장을 하던 첫 직장에서의 한계를 깨닫고 방황하고 있던 때였다.

우연히 찾아 들었던 오락실이 도박장임을 깨닫고 발길을 돌리려 했지만 며칠 후 난 호기심으로 다시 그 곳을 찾았다. 그 후 가끔씩 용돈과 업무에 지장을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름을 즐기던 나는 차츰 도박이 주는 불확실성에 의한 행운에 몰두하게 되었다. 더구나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첫 직장을 그만 두고 실직 상태에 빠지자 도박에 대한 유혹은 겉잡을 수 없이 다가왔다.

옮기려던 직장의 내부 사정으로 입사는 취소되고 1년의 공백을 갖게 되어서는 완전 도박 중독에 철저히 무기력하게 되었다. 직장생활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과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장남 콤플렉스가 도피처를 찾고 있던 때여서 더욱 쉽게 도박의 유혹에 빠졌던 것 같다.

저축과 소액의 퇴직금을 날리고 신용카드 서비스 등으로 도박에 빠지곤 했던 나는 1년여의 공백을 거쳐 외형으로는 국내 최고라는 대기업에 입사함으로써 도박으로부터 벗어 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는 엘리트 집단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는 조급함으로 정력적으로 업무에 몰두함으로서 도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직장생활에서도 성공하고 싶었다.

입사 초기에는 전 직장에서의 경력과 왕성한 업무 의욕으로 인정받는 경력사원으로 평판을 얻기도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도박으로부터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당시엔 자각하지 못했지만 잠재해 있던 도박에의 갈망이 새 직장에서 1년여 잠복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외부 업무가 많은 업무 성격상 입사 초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도박장 출입이 재개되었다.

급여는 물론이고 신용카드가 늘어나고 심지어는 사채까지 끌어 들이게 되었다. 밤늦게 때론 밤 새면서 도박에 매달리다 보니 직장에선 항상 수면부족인 상태였고 업무 착오가 늘기 시작하면서 직장에서의 평판 또한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박으로 인한 상실감, 돈을 잃고 나올 때면 나 자신을 저주했고 지연된 업무처리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단도박을 결심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내게 극복할 수 없을 거라는 운명적인 체념감이 싹트고 있었다.

나의 인생은 이렇게 파멸된 것이라는 자학적인 심정에까지 빠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나의 운명은 거부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면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다달아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 모은 80개의 수면제로 이름 모를 도시의 낯선 여관방에서 자살을 꾀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모두 토해버리고 말음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사표를 내는 것으로 직장을 다시 한번 정리했지만 도박에 빠져 있다는 것은 나 혼자의 비밀이었고 동료들과의 관계는 무난한 편이었기에 직장에서 따뜻하게 보내 주었다. 그 직장 동료 중 유난히 내게 안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한 여직원, 그녀와 함께 난 새 인생을 설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난 나의 운명을 다시 만들고 싶었다. 나약한 의지와 상처입은 영혼일지라도 1+1=2가 아니듯 날 사랑하는 한 여인으로 내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몇 달 뒤 나는 다시 작은 회사이긴 하지만 직장을 잡을 수 있었고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나의 ‘백치 애인’으로 인해 기나긴 방황의 끝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나의 도박중독을 모르고 있었지만 내 자신도 도박으로 인한 채무와 후유증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새로운 생활과 장래에 대한 비전을 가져볼 수 있는 시기였다. 우리의 사랑은 급속히 추진되었고 나의 추악한 과거는 묻힌 채 주위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직장 생활 몇 년 동안 모아 놓은 돈도 없이 대출과 아내의 저축으로 새 삶은 시작되었다. 아내는 직장을 다니며 야간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기에 우린 평범하지 않은 새 생활이었지만 장미빛 꿈에 젖어 신혼을 보냈다. 조기 출근으로 6시면 집을 나서는 아내였고 저녁이면 12시가 다 되어 귀가했지만 난 그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되기만을 기원했다.

아내의 리포트를 대신 써주며 아내 없는 컴컴한 우리 방으로 들어서면서도 도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몇 달 후 예정보다 빠르긴 했지만 아내와 나의 아이가 생겼다. 맞벌이와 아내의 학업... 힘들긴 하겠지만 우린 2세의 탄생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나의 도박 중독은 다시 한 번 나뿐 아니라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까지 처절한 절망을 안겨 주었다. 다시 악순환은 시작되었다. 용돈에서 시작한 도박자금은 현금 서비스, 월급, 은행 대출, ...

아내의 배가 불러옴과 동시에 도박 빚은 늘어만 갔고 마침내 늦은 귀가와 외박으로 나의 도박병은 아내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정신적 고통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삭의 아내와 함께 찾았던 G.A.

그것은 내 운명으로부터의 도피이자 새 삶의 첫 걸음이었다. 아직도 시행착오는 계속 중이지만 G.A.로 인해 난 다시 태어날 것을 이제는 믿는다.

도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그것이 내 남은 생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