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허비한 내 인생

미국LA 모임/시애틀 김

나의 도박인생은 고등학교 1학년부터 시작되었다. 아는 형을 찾으려고 동네 당구장에 들어서니 같은 또래의 아는 얼굴도 있었고 그들의 당구치는 모습이 너무 근사해 보였다.

그 후로 학교생활은 뒷전이었고 틈나는 대로 당구장에 출입을 했다. 얼마나 당구에 몰두했는지 버스를 타면 사람들의 머리가 당구 공으로 보일 정도였다.

중간고사나 기말 고사 땐 친구네 집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부모님을 속인 후 밤을 새우며 내기 당구를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 시 급우들은 상장을 받고 소원하는 학교에 합격하여 미래에 대한 부푼 꿈으로 젖어 있을 때. 나에겐 '당구 400'이란 불명예스러운 계급장과 그에 걸 맞는 대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3년 대학에 입학하여 입대할 때까지 3년 동안 내기 당구와 술로 젊음과 세월을 탕진했다. 전공학과가 나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 동안 이수한 학점은 군 혜택을 주는 교련과 불과 몇 과목뿐이었다. 장래에 대한 뚜렷한 방향도 없이 .... 부모님께서는 모르고 계셨지만 밖에서는 혼돈 된 생활을 하였다.

30여 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이듬해인 1979년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마음에도 없는 대학을 복학하여 다시 다니고 싶지 않았고 재기의 발판으로 삼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기회로 여겨 미국 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1979년 10월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하와이 L.A를 경유 목적지인 콜로라도 덴버에 도착했다. 곧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만학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과거의 불성실했던 삶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고학을 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키워가고 있었다.

미국 생활 3년째 접어들고 있었을 때 도박으로 인한 재앙이 시작되었다.

어느 여름날, 함게 지내던 룸메이트의 친구들이 놀러와 한판 포커판을 벌리고 갔다.

포커를 배우게 되고 주말이나 가끔씩 즐기던 놀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판돈으 커지고 급기야는 조직 범죄 단이 운영하는 사설 도박장에 출입하게 되었다. 몇 년을 이렇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보니 학업은 중도에서 포기하게 되고, 빚은 늘어나 가슴을 누르고, 몸은 담배에 스트레스에 찌들려 추한 도박꾼의 모습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으로부터 듯하지 않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버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신후 의식불명 중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건강하셨던 분이....여러 형제들 중에서도 유난히 나를 사랑해 주셨던 아버님이 돌아 가셨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꼭 성공하여 돌아가 자식도리 한번 해 드리리라 다짐했는데.... 아버님의 죽음이 분명 나의 죄악 된 생활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더욱 더 통한의 슬픔과 죄책감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차라리 울다가 숨이 막혀 아버님 곁으로 갔으면 싶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아버님께 불효했던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본 후, 이제라도 어두운 생활에서 벗어나 생전에 당신께서 자식에게 바라던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옷가지 몇 개와 책가방 하나만을 남겨 놓고 돈이 될만한 모든 살림을 트럭에 실어 노름 빚진 자들에게 던져 주고, 곧바로 비행장에 달려가 뉴욕 행에 몸을 실었다. 아무도 기다려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하고 싶어서였다.

뉴욕에 도착하자 곧 일자리를 얻어 주경야독한 끝에 1987년 뉴저지 주립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게 되었다. 한 번도 대학 입학이 힘든데 3번씩이나 기회가 주어 졌으니 행운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33살의 굳어 진 머리로 어린 학생들 틈에서 모든 교과를 성공적으로 마치기란 천형과도 같은 험난한 길이었다. 너무나 힘이 들어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하려 했지만 아버님과 한 약속과 뉴욕에서 대학원에 다니던 현재의 아내를 만난 것이 큰 힘이 되어 73년도에 입학한 대학을 90년도에 비로소 마치게 되었다.

졸업 후 취직을 하여 아내와 함께 맞벌이 부부가 되어 열심히 가정을 꾸려 나갔다 곧 딸 아이도 태어나 집안에 웃음꽃을 피우고 집도 장만하여 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을 하였다.

아내와 아이 나의 이름 머리글자를 딴 회사를 설립하여 도약의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학부에서 전공한 것을 틈틈이 노력하여 자격증을 따 놓았으며, 아버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야간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슨 신의 질투인가? 아니면 자제력이 부족한 나의 약점을 아는 도박 귀신의 장난인가? 나는 다시 도박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제껏 일궈 놓은 모든 것은 물론 가정이 파괴되고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 주말, 뉴저지 남단 해변가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애틀랜틱시티 카지노에 들린 것이다. 도박은 이제 오랜 전에 그만 두었기에 도박에 대한 사전 경계심이 없이 식사도 할 겸 구경삼아 들리어 불랙잭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돈이 오고가다가 많은 돈을 따게 되고 다시 다 잃고, 오히려 가지고 잇던 돈 외에도 카드로 상당한 액수를 잃게 되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은 벌어 졌고, 나는 이성적으로 대처할 여유나 능력이 없었다. 다음날 자석에 끌리듯 카지노로 달려갔고, 그 이후 카지노 출입은 계속 되었다. 잃은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 갔지만 아내가 알아차리기 전에 찾아보기 위해 더 무모하고 승산 없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아내에게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다녀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도박에 매달렸다. 도박자금이 떨어지자 카지노로부터 고액의 신용대출(Marker)을 여러 곳에서 받았지만 모두 잃고 말았다. 다음엔 정기 적금 (CD),은퇴 연금(IRA)생명 보험을 해약하여 다 잃고, 친구와 형제들, 심지어는 연로하신 어머님에게까지 손을 뻗치어 도박자금을 마련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돈이 떨어지자 이제는 마지막 수단으로 사채업자의 돈을 쓰게 되었다. 카지노에 기생하여 범죄 조직에 의해 운영되는 이들에게 걸리면 헤어나기 힘든 줄 알지만 바닥까지 간 이 마당에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었다. 집을 담보로 빌린 돈의 액수는 나날이 많아지고, 갚기로 약속한 날짜는 다가오는데 나에게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내가 한국에서 돌아 왔을 땐 사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를 대할 면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집 주위에는 사체업자들이 해결사들을 앞세워 나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집에 머무를 수 없었고 아내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딸아이와 큰 집에 있는 것이 무섭고 두려워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다. 불과 얼마 전 웃음꽃이 피던 행복한 Sweet Home이 죽음보다 더 싸늘한 침묵이 흐르는 폐허로 변한 것이었다.

결국 집을 팔아서 빚을 정리하고 아내와는 별거에 들어갔다. 형언할 수 없는 아내의 고통을 보면서도,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아이가 겪는 고통을 알면서도, 나의 발길은 여전히 카지노를 향하고 있었다. 한동안 딸아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보지 못한 무책임한 자이지만 아내에게 재결합하기를 원했고, 아내는 이제 더 잃을 것도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가 변화되기를 바라며 나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

한 때는 행복한 꿈을 꿨지만 이제는 온통 상처로만 얼룩진 뉴저지에서 차를 몰고 록키 산맥을 넘어 서쪽 끝인 시애틀로 삶의 터전을 옮겨 왔다. 외롭게 떠돌던 얼마전의 생활에 비해 아내와 자식이 곁에 있으니 마음은 다시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아내의 헌신적인 희생과 어린 자식이 받은 상처, 그로 인해 죄책감들이 차츰 잊혀 가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잃어버린 돈에 대한 분노가 독사처럼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천인공로 할 자가 어디 있을까? 아내와 아이를 낯설고 물설은 외지에 가둬 놓고 어둠의 세력에 이끌리어 나는 다시 카지노로 향하였다.

이제는 씨애틀도 좁아서 무대를 L.A와 라스베가스로 옮겼다. 도박에 대한 승산이 없는 카지노게임 (블랙잭, 바카라, 슬롯머신...)보다는 포커로 승부를 걸었다. 나보다 승가 낮은 포커 판들을 상대로 남을 죽이고 내가 살려는 인면수심의 추악한 각오였다. 악령이 주는 술수 덕분에 나는 포커 판에서 남의 돈을 갈취할 수 있었고, 1998년도 세계포커 토너먼트에서는 결승(Final Table)에 여러 차례 진출하여 100여 만 불의 상금을 눈앞에서 놓쳤지만 10여 만 불이 넘는 상금을 받아 도박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악한 마음을 먹은 자들이 번성하여 살도록 지어 놓은 이 땅이 아니었다. 어린 자식이 받을 충격을 염려하여 신이 연장해 준 인내의 기한이 다 된 것일까? 1999년 5월 31일 나는 라스베가스 M카지노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불과 일주일 전 혼수상태에 빠져 응급처치를 받은 적이 있고 상태가 계속 악화되어 나는 머지않아 불길한 일이 벌어지리라 알고 있었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앰블런스로 S병원에 옮겨 진 후 깨어났을 때 실날같이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 이 호흡이 언제 멎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 나는 혼 빠진 사람처럼 달려 왔는가?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물질만이 성공의 기준으로 잘못 알고, 그것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자신의 면에 사로 잡혀 아무도 원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 그 신기루 같은 악한 재물을 잡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 온 것이 아닌가, 이제 죽음의 기로에 선 나에게 그러한 재물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꺼져 가는 생명을 단 1분이라도 연장할 수 있으며 처자와 노모 형제, 친구들에게 남겨준 상처, 배신과 실망은 어떻게 회복하고....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카지노에서 허비한 수많은 세월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뒤늦게 후회를 해 보았지만 호흡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뿐이었다.

부끄럽고 추악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위대한 힘께 마지막으로 용서를 비는 것이다. 수도 없이 끝도 없이 ... 범죄하며 살아온 과거를 나는 하나하나 입으로 시인하며 다가올 최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양손에 꽉 잡고 있었던 욕망들을 그 분 앞에 하나 둘씩 내려놓았을 때, 꺼질 듯한 나의 호흡은 계속 되었고, 죄악으로 병들어 죽게 된 나의 영혼은 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 뜨거운 참회의 눈물에 씻기어 소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도박으로 황폐해 지고 타락된 나의 인생은 끝이 났고 위대한 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도박과 헛된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나 생활한지 3년 4개월, 도박중독자임을 시인하고 생명의 길을 선택하여 살아온 하루하루였다. 매주 단도박 친목모임(Gamblers Anonymous)에 참석하여 교본을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재점검하고 회원들간의 체험을 서로 나누고 친목을 통해 생명의 길로 함께 할 수 있도록 위대한 힘께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나의 남은 시간들이 위대한 그 분의 뜻대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다시 결합하기가 힘든 가정이었지만 대화의 시간이 더욱 길어진 신뢰의 관계로 회복되었고 상처들은 차츰 치유되었다. 아직 아픈 과거의 기억은 남아 있지만 오늘의 삶 속에서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