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새로운 시작

사당동/여의도 이

1987년 8월 22일. 저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머리 속에는 여러 생각과 결심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막내를 먼 이국땅으로 보내시는 부모님의 염려스러운 얼굴과 비행장까지 나와주었던 친한 친구들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최고의 학교를 적성에 맞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하고 낯설은 곳으로 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난 8년동안 회상해보지 못했던 저의 미국으로의 첫 여행을 이제야 되돌아 볼 수 있음에 어떠한 느낌을 가져야 하는지 혼란스럽기조차 합니다. 저는 이 체험담을 쓰는 기회를 통해 저의 도박 경험의 시작과 저의 인생에서 마지막이길 바라는 그 순간까지를 돌아보고 그 시간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미국에 도착하고 약 10일이 지난 후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었던 첫 학기였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저는 최선을 다했고 8년의 유학 기간 중 유일하게 만족한 결과를 얻은 한 학기였습니다. 결과에 부모님도 만족하시고 저 역시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한 학기가 지나고 약간의 여유를 찾은 저는 많은 한국 학생들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생활에 성실한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자유스러운 생활에 푹 빠져버린 저는 약간의 문제를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히 공부와 관계없는 여러 다른 오락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여행을 떠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목적지는 제가 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3 시간 거리에 있는 카지노가 있는 조그만 도시였습니다. 2박 3일의 예정으로 떠난 그 곳은 스키도 타고, 호수에서 유람선도 탈 수 있는 휴양지였습니다. 첫 날 저녁에 도착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의논한 끝에 결국은 도박을 조금만 해 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를 포함한 4명의 친구들은 곧장 카지노로 향했고 도착한지 1시간도 안되어 블랙잭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순간이 8년이란는 시간을 헛된 망상으로 허비하게 된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1,000이 넘는 거금을 따게 되었고 나머지 날들을 호화롭게 지내고도 돌아올 때는 지갑의 돈이 오히려 많아져서 집으로 돌아서 돈을 따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우리를 계속 유혹했고, 이제는 단순한 여행이 아닌 도박을 위한 그 곳으로 여행이 잦아지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너무나도 뻔했습니다. 거의 매 주말이면 그 곳으로 갔고 잃는 돈은 점점 불어나기만 했습니다. 돈을 따기 위해 가던 것이 이제는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더 자주 그 곳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수업을 빼먹고 주중에도 그 곳으로 향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엉망이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 걱정하기 보다는 도박으로 잃은 돈을 어떻게 다시 도박을 해서 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는 샌프란시스코에도 도박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거의 매일 그 도박장을 출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더 많은 돈을 잃었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는 온갖 거짓말로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많은 돈을 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도박에 빠져있던 저는 죄책감을 느끼기 보다는 도박을 하여 더 많은 돈을 따서 보답하면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학교생할은 엉망이었고 도박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기만 했습니다. 결국은 학교를 로스엔젤레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옮기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결심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너무나도 쉽고 허무하게 깨어져 라스베가스와 L.A. 근처에 있는 도박장을 출입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생활이 너무나도 엉망이었지만 집에는 계속 거짓말로 핑계만 대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부모님은 제가 군에 입대하기를 원하셨고, 저 역시 오랜 방황에 지쳐 1991년 10월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군에 입대하여서야 5년의 세월 아무런 성과 없이 자나가 버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고,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약 2년 반의 군 생활동안 다시는 도박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만을 되풀이 했습니다.

귀국 후 부모님은 GA에 나가보자고 강력히 권하셨습니다. 저는 스스로 도박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부모님 뜻에 따라 약간은 억지로 GA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 오늘이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그만 둔 그 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GA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무엇인가 다른 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였고, 그것이 분명 새로운 시작이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저의 도박에 대한 확실한 마무리가 없는 막연한 기대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 괴로운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저는 8년 동안의 도박생활을 제 생각 속에서 지워버리려 하였습니다.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GA에 참석한 지난 6개월 동안 이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인생을 새로이 시작할 용기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망각이 아닌, 과거를 통해 남은 미래를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개월 전의 도박이 제 인생에서 마지막 도박이었음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잊기 보다는 제 마음 속에서, 제 인생 속에서 앞날을 향해 나아가려는 저의 의지에 좋은 교훈으로서 위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지난 8년의 세월은 제 가슴 속에서 도박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너무나도 커다란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며, 앞으로 저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해 주는 교훈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