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그리고 희망

대구 상동 조

지금부터 5년 전 초가을! 전 착하고 평범한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랑하는 부모님 곁을 떠나 새로운 인생의 첫발을 내딛였습니다. 반듯한 아파트에 회사 지사장님보다 더 좋은 승용차에, 안전한 직장에, 일찍 퇴근해 오는 신랑에, 딸처럼 생각해 주시는 시부모님에, 전 그 어떤 신부보다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행복감에 젖어 깨어나기도 전에 제 주변에는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신혼의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일찍 퇴근해온 남편이 연신 줄담배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눈치였습니다. 전 여린 새댁의 마음에 왜 그러냐고? 걱정이 있으면 같이 해결하자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한마디로 몰라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캐묻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면 남편은 이렇게 심한 중독성 도박환자가 안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힘겹게 내뱉은 한마디가 도박으로 인해

삼백만원 정도의 빚을 졌다는 얘기였습니다. 전 기가 막혔지만 한번은 실수로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는 마음에 다시는 그러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쉽게 돈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게 화근이 된 것인지, 그날 이후로 남편은 점점 변해 갔습니다. 잠시 잠자고 있었던 도박이란 고질병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인지 일년에 한두 번씩 터지는 금액은 점점 커져만 갔고 그와 더불어 제 연분홍빛의 신혼은 원망과 고통과 분노의 좌절로 물들어 갔습니다.

제 작은 가슴이 온통 눈물로 얼룩졌고 주변 사람들과도 점점 멀어지고 말못할 고민으로 저 혼자의 높은 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신용카드를 최대한도까지 결재해서 쓰고는 말 한마디 없이 회사에 사표내고 사라져 버린 남편, 실컷 돌아다니다 돈 떨어지면 들어와서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 만나서 다른 데 가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무책임한 사람, 도박 이외에는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한 남자.

전 울어도 보고 애원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남편에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전 소설 속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온갖 죽을 방법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목숨은 진정 하늘이 주신 것인지, 오기였는지, 아니 억울해서라도 전 그렇게 죽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내 믿는 크신 이에게 밤을 새면서 기도도 해 봤고, 유명하다는 철학관까지 찾아 다녀 보고, 전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얘기에 전세금을 빼내서 돈을 갚아주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한여름 사우나탕 같은 곳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같이 직장생활도 해보고....

하지만 모두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있다고 했는 데 전 하챃은 미물만도 못한 지, 끝이 없는 남편의 도박으로 인해 희망이 없는 세상을 그저 마지 못해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갚아도 갚아도 늘어나는 빚으로 인해 내 가정은 깨어진지 오래고 시아버지까지 남편으로 인해 파산지경에 이르고 보니 제가 설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어져만 갔습니다. 남편이 도박에 빠져들수록 가을 산의 단풍이 들듯이 제 마음의 병도 깊어져만 가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픈 줄을 모르고, 잠도 오지 않고,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94년 그 무덥던 여름!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는 남편 말에 의심을 하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라는 생각으로 시댁에서 대충의 살림을 챙겨서 한 칸 방에서 우린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처럼 한동안 남편은 너무나 성실히 행동했었습니다. 전 언제 변할 지 오르는 남편의 행동에 불안한 마음으로 늘 긴장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약 10개월간을 잘 참아내더니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간다던 도박 병이 다시 재발을 했습니다. 남편은 이미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전화 한 통화 없이 제 곁을 떠났습니다. 전 솔직히 남편이 어디서 무얼 하는 지 걱정스러운 마음과 차라리 죽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약 2년 전 성당주보에서 봤던 중독성 도박환자들의 “GA모임”만이 제가, 아니 남편과 제가 같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어렵게 전화를 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첫 토요일 모임에 남편 없이 혼자 나갔습니다. 전, 세상에서 나하고 똑같은 고통 속에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첫날, 가족 모임에서 물질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이상하게 보였고, 누구한테도 털어 놓을 수 없었던 가슴속에 응어리진 얘기를 하자니 설움이 북받쳤습니다. 그 후로 얼마간의 기간은 혼자서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백일잔치, 일 년잔치, 이년 잔치...

촛불 속에서 자기의 진실을, 성숙된 삶의 모습들을 얘기해 나갈 때, 저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사람이 저렇게도 달라질 수 있나 보다며 잔치속의 주인공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그러던 중에 집을 나갔던 남편은 돌아왔지만 자기 스스로 중독성환자인 것도 알고 있으니 도박을 안 하면 된다고 “GA 모임”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토요일이면 주인 아줌마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같이 손을 잡고 모임에 나가는 “GA 모임”의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GA 협심자와 가족협심자 도움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우린 벼랑 끝에서 희망의 굵은 밧줄을 잡았습니다.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은 너무나 많지만 이제 전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 시간 내에 모든 것이 변화될 수는 없겠지만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해 고통으로 얼룩졌던 어제라는 지나간 시간에 미련을 두지 않고, 다가올 의미 +없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주어진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그저 단순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남편은 조금씩 변화된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고, 제 자신도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혈연으로 맺어진 식구보다 더 소중한 G.A 식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