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다

의정부 민

‘아빠’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려 보니 조그만 아이가 서 있었다. 쪼르르 달려오는 그 아이를 번쩍 안으며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내 딸 아이가 아닌가? 몇 날을 그리던 그 얼굴에 뺨을 대려는 그 순간 저만치 서 있는 아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 왔다. 순간 오던 길을 되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눈물 가득한 아내의 눈망울에 두 다리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결혼 전에 가끔 들렸던 그 주점에 들어가 앉았으나, 나는 그저 동동주만 쉴 새 없이 들이 켰고, 아내 역시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술기운이었던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급기야 난 통곡을 하고 말았다. 내 인생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던가?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여자에게 이 고통을 주고 있는가?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나는 가출한지 20여일 만에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 20여 일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아니, 지나간 10년의 세월동안 나는 무슨 짓을 했던가?

대학 기숙사에서 며칠을 새워 포커를 치던 날에도 나는 내 인생에 자신이 있었고, 등록금을 전자 고스톱으로 날리고 가짜 졸업식을 했던 그 날도 난 부모에게 효도할 날이 올 거라고 믿었고, 졸업장이 없어서 빈둥거리다가 아버님이 하시던 사업에 뛰어 들어 돈만 생기면 빠징고 가게 앞으로 달려가던 그 시절에도 내 인생은 보랏빛 꿈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가 허공에 뿌리면서도 남편 좀 이해해 달라고 아내에게 시비를 걸던 신혼 때도 난 아내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큰 소리 쳤었다.

사람들은 나를 공부 잘하는 성실한 청년으로 기억해 주었고, 성당에서는 꽤나 재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지만, 나는 서서히 황폐해져 갔고, 아내는 내 뒷감당하느라 정신없었고,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이 둘이 생겼다.

점점 도를 더해가든 도박 병은 급기야 3,4일 가출하는 게 습관적이었던 나는 이제 나는 20일이 넘도록 방황했고, 그 액수도 대담해질 정도가 되었다.

이틀 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던 내게 아내이건 부모이건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문밖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이틀이 지나간 밤에 아내는 내게 이것저것 캐 물어 왔고, 나는 내가 진 모든 빚이며 그동안 해 왔던 거짓을 낱낱이 고백하게 되었다.

아! 도대체 이건 또 무언가?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 오랜 세월동안 내 가슴을 짓눌렀던 그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나를 향해 쏟아질 사람들의 질타가 하나도 무섭지 않다니! 난 밤새 벅찬 감격으로 또 한번 울어야 했다.

그 다음날 아내의 권유대로 아내와 함께 예전에 잠시 다녔던 G.A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교재에 나와 있는 문구 하나하나, 협심자들의 고백 하나하나가 내가 꿈꾸어 왔던 허상들을 차례차례 처 부수었고, 내 의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선언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난 지금 이 시간 나를 더욱 편안하게 하고 가슴 여미게 하는 것은 도박을 안 하고 잇다는 단순한 위안보다 그 행복....남들은 어쩌면 일찍부터 깨닫고 , 일찍부터 누리고 있는 그 행복.....가족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내가 하는 일에 애착을 가지고 매사에 성실하고 솔직하며, 진실로 나를 사랑하며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그 행복이 누구보다 어느 때 보다 진하게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요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중독성환자’라고 얘기한다. 아내는 내 변화된 모습에 한없이 기뻐한다. 이렇게 살수만 있다면 하루만 산들 어떠랴!....십자가의 고통까지는 33년이 흘렀지만 부활까지는 단지 3일 뿐인 것을! 밤이 깊을 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