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의 백일

사당동 / 흑석동 임

먼저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GA 모임으로 이끌어 주신 위대한 힘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질곡의 세월과 함께 어렵고 힘든 과정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항상 이 도박중독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늘 곁에서 믿음의 눈으로 지켜봐 준 세상에 하나뿐인 아내 박 여사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이 12월 31일, 2004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면 갑신년 한해가 저물고 을유년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매년 12월말이면 늘 지난 한해가 아쉽고 이루지 못 한 계획들에 대한 후회로 가득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단면이겠지요. 하지만 도박으로 망가져 있는 저에게 연말은 카드 빛, 은행 대출금 등 늘어만 가는 부채에 한 숨을 토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아픈 현실이었습니다. 참으로 모질고 끈질긴 것이 도박 병이라는 것을 이제는 뼈 속 깊이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저의 도박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첫 해부터였습니다. 물론 그 전에 학교 다닐 때도 친구 따라 가끔 전자오락실이라는 곳을 다니며 시간과 돈을 허비하였지만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신입사원 시절, 제가 스스로 월급을 받고 난 뒤였습니다. 늦어지는 귀가 시간 그리고 잦아지는 외박에 부채는 눈 덩이처럼 커져 가고 빛 독촉의 압력을 감당해내기 어려워지자 가족(형님)의 1차 도움을 받아 겨우 급한 불은 껐지만 도박 병은 여전히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사내에서 박 여사를 만나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 기간 중에도 대박의 허황된 꿈을 쫒아 시간이 날 때마다 몰래 성인오락실을 찾아 다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 하였지만 신혼의 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큰 딸아이 백일이 지나고 얼마 후 와이셔츠 차림으로 오락실을 찾은 나는 2주일 동안 집도 회사도 잊은 채 도박에만 매달리다 땡전 한 푼 남지 않은 빈 주머니가 되고 나서야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체념하고 있던 차에 다행히 회사에서는 재발만 하진 않는다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선처를 받고 처가 및 아내에게 용서를 구한 뒤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끝도 없는 나락의 구렁텅이에서 그나마 세상을 향해 다시 얼굴을 들고 얼마간 정신을 차리고 살았습니다. 그 해 말 퇴직금 중간 정산 및 울산으로 전보를 받아 전세금으로 부채를 해결하고 울산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울산에서의 생활은 사택 지급 등 제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고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많은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도박장과의 공간적인 격리로 그나마 한동안 도박을 잊고 살았지만 주식 투자가 문제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목돈마저도 거의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서울로 전보를 받게 되었고 한 달 만에 다시 도박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 모진 운명이여… 내 몸 안에는 왜 이다지도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인가? 자책도 해 보았지만 여전히 늘어가는 것은 카드 빛이었습니다. 지난 3년간의 울산 생활은 한 여름 밤의 꿈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박 여사를 안심시키면서 몰래 도박장을 출입하면서 나의 영혼은 그 깊이를 알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속되었던 나의 이중생활은 2003년 4월 아내 앞에 백일하에 드러났고 이혼이라는 갈림길에서 GA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처음 느꼈던 어색함과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에 도박이 중독성 질환이고 나 역시 중독성 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관념으로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재발은 어쩌면 필수 코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80일 만에 재발 그리고 충격…. GA를 알고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던 아내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직장 상사에게까지 알려져 직장생활 역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고 재발 시 조건 없이 퇴직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고 매일 하루살이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스스로에 대한 절망감이 가장 극복하기 힘들었던 시기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재발이 약이 되었던지 GA 모임의 필요성을 새삼 새롭게 느끼고 모임에 나가는 횟수도 늘었습니다. 그러던 와 중에 100일 잔치도 하게 되어 단도박에 대한 자신감도 한층 고취되었습니다. 하지만 100일 이후가 더욱 위험하다는 선배님들의 충고 및 염려가 나의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도박에 관한 한 나의 신념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다시 망가진 저는 이전 보다 훨씬 심하게 도박에 빠졌고 이제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GA 모임 핑계를 대고서 까지 도박을 했으니까요.

GA와 멀어지면 나타나는 필연의 코스 "재발", 문제의 본질을 왜 제대로 직시하지 못 했는지? 내가 이토록 의지가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단 말인가? 죽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럴 용기도 없는 지지리도 못난 자신을 보면서 아내와 두 딸들이 한없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미친놈처럼.

가족을 위해 금년 초에 들었던 종신보험을 생각하며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사고사가 아니면 보험금 지급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절망의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아내는 의외로 차분한 모습으로 나를 안심시키며 이왕 이렇게 된 것 GA를 믿고 계속 나가라고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두 딸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며… 이 어린 것들을 부모 없는 고아로 만들지는 말자며 가족은 나에게 그렇게 다시 용기를 주었습니다. 물론 다른 한 손에는 이혼 신청서를 쥐고 빈칸을 채우라는 협박과 함께 말입니다.

그날 이후로 다시 찾은 GA는 그 동안 제가 느끼지 못 했던 평온함을 안겨 주었고 혼자서는 단도박을 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파랑새는 다름 아닌 GA 안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믿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그리 조급하게 뭔가를 이루려는 욕심을 버리고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 과거를 돌아보되 후회가 아닌 과거 사실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리고 미래를 바라되 허황된 꿈이 아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바로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 행복을 찾는 그런 생활 습관을 키워가도록 애쓰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가 이렇게 다시 일어서서 100일 잔치를 할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와 용기 그리고 많은 관심을 보여주신 GA 내 모든 협심자 및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잦은 재발에도 때로는 부모처럼 때로는 형제처럼 항상 변함없는 사랑과 아낌 없는 도움을 베풀어 주신 사당동 GA 모임의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비록 2번째 백일잔치지만 그동안 너무나 많은 마음고생에도 끝까지 참고 견뎌준 아내, 박 여사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앞으로는 절대 GA 끈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2005년 새해 선물로 바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GA 안에서 겸손을 배우고 GA 앞에서 더욱 정직해지는 2005년 한해가 되기를 바라면서 여러분 모두의 건강을 기원합니다.